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스 라벨 (문단 편집) == 생애 == 1875년 [[스페인]] 국경 근처의 [[프랑스]] 시골 마을인 시부르[* Ciboure]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후 몇 달 안 되어 [[파리(프랑스)|파리]]로 이사를 가게 되어 그는 계속 [[파리(프랑스)|파리]]에 살게 된다. 아버지는 [[프랑스]]계 [[스위스]]인, 어머니는 [[스페인]]계[* 정확히 말하면 [[바스크]]족.]였는데,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후 '볼레로', '[[스페인]] 광시곡',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등과 같은 [[스페인]] 느낌이 풀풀 나는 곡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화성을 배우며 음악의 기초를 쌓았고, 14세 때 [[파리(프랑스)|파리]] 음악원 피아노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음악원에서는 성적이 영 좋지 못했는데, 화성, 피아노 과목에서 낙제를 당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스무 살의 나이로 음악원을 자퇴하고, 그로 인해 교수들에게 미운 털이 제대로 박힌다. 하지만 이 때부터 그가 작곡한 곡들은 충분히 그의 재능을 보였고, 2년 후 다시 [[파리(프랑스)|파리]] 음악원 작곡과에 재입학한다. 이 때 [[가브리엘 포레]]를 사사하고, 에릭 사티와 같은 비주류 음악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고, 이 당시 작곡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은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26세, 그는 로마 대상[* 이름은 로마 대상이지만 이태리와 관계없는 [[파리(프랑스)|파리]] 음악원 주최다. 우승하면 [[로마]]로 보내주는 것 같다.]에 도전하는데, 첫 도전에는 [[2등]], 이후 연달아 본선에서 탈락, 그리고 마지막 도전에는[* 로마 대상에는 나이 제한이 있어서 30세의 라벨은 이번에도 떨어지면 끝인 상황이었다.]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후에 그가 충분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대상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나서 그는 [[파리(프랑스)|파리]] 음악원을 떠나게 된다. 이런 일이야 이단자적이라고 표현될 정도였던 그의 혁신적인 음악이 인정을 못 받아서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이 때의 라벨은 '물의 유희', '현악사중주 F장조' 등으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였다는 것. 당연히 이 사건은 언론의 지탄을 받았고, [[파리(프랑스)|파리]] 음악원 교장의 해임 등으로 [[프랑스]] 음악계에 [[대격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대한 사과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지만, 라벨은 이 훈장을 거절한다. 이후 그는 발레 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 관현악곡 '스페인 광시곡', 피아노곡 '밤의 가스파르', '소나티네'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창작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에 지원했으나 탈락하고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리 부상 때문에 제대한다. 전쟁이 끝나고 드뷔시도 타계한 이후에, 라벨은 명실상부 프랑스 음악계 최고의 거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창작 활동이 진척을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1차대전 참전 후의 충격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 그러나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하면서 극복한다.[* 여러 곡을 모은 모음곡이다. 각 곡은 전사한 친구들에게 헌정되어 있다.] 전후 [[프랑스]] 음악계에서 [[프랑스 6인조 |6인조]](Les Six)의 약진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재기한 라벨은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과 같은 화려한 테크닉의 [[피아노 협주곡]]과, '[[라 발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볼레로]]'''를 발표한다. 1932년 택시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다치게 되고, 이후 건강이 악화된다. 이 때 부상으로 더 이상 작곡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기억감퇴 및 온갖 병세로 사생활적으로도 어렵게 되었다. 1933년에는 신경계 계통의 질환을 앓고[* 이 무렵에 라벨은 "내 머리 속에는 아직도 많은 음악이 남아 있는데..."라는 말을 남겼다.] 1937년 뇌 수술을 받지만 건강은 여전히 악화되어 결국 그 해 6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